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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한 권

하루 한 권_지금 그 느낌이 답이다[바스 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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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이유

새로운 창의적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한다. 그러나 가끔 우리의 창의성은 어딘가 숨어버린 듯해 느껴진다. 그렇다면 창의적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

이 책의 저자는 창의적 사고는 이성의 결과물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우리의 이념과 사상은 우리 안의 비이성적 영역인 무의식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아인슈타인은 언어가 우리의 사고에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주장했고, 그 대신 직관의 손을 들어주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직관이다. 직관의 정신은 신성한 선물이며 이성의 정신은 충직한 시종이다. 우리는 시종은 예우하면서 선물은 망각해버린 사회를 만들었다."라고 말한 그의 직관의 정신이 바로 이 책의 목적이다.

이 책은 우리가 내면의 비이성적인 힘을 믿고, 직관을 존중하며 창의성의 선물을 예우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직관의 힘을 발휘하여 참신하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이끌어내는 비결을 풀어내는 이 책은 우리에게 무한한 창조력의 문을 열어줄 것이다. 세상에 없던 새로운 아이디어를 발견하고자 하는 여러분을 위한 놀라운 여정이 시작해보자!

작가소개 바스 카스트

1973년에 독일에서 태어나 독일 콘스탄츠대학과 보훔대학에서 심리학과 생물학을, 미국 MIT대학에서 마빈 민스키 연구 과정을 공부한 후 기자로 활동하고 있는 바스 카스트는 현재 독일에서 가장 주목받는 신진 저널리스트이자 심리학자이다. <네이처>에서 견습 기자 생활을 거쳐 2002년부터 지금까지 <타게스슈피겔>의 과학부 기자로 일하고 있으며, 의학 저널리즘 부문의 바머상과 젊은 저널리스트에게 주는 악셀 슈프링어상을 수상할 정도로 높은 필력을 인정받고 있다. 일상에서 쉽게 마주치는 인문학적 사회 현상들을 과학적인 시선으로 풀어내는 글쓰기에 능하며, 이를 바탕으로 많은 베스트셀러를 펴냈다. 지은 책으로는 『머릿속의 혁 명: 뇌의 미래, 21세기를 위한 사용설명서』, 『왜 사랑인 줄 몰랐을까』, 『선택의 조건』 등이 있다.

 

5분 요약

우리에게 이성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이성에게 판단을 맡긴다. 어떤 상황에서도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게 아니다’라는 느낌을 무시한다. 이처럼 이성을 거친 판단을 믿고 선호하는 것은 일반적인 성향이다. 이것은 이성이 쉽게 방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누군가 왜 이런 결정을 내렸냐고 물으면 결과를 분석하고 변호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모든 교육 시스템은 이성 위에 만들어졌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욕구를 말로 표현하라고 요구한다. 대학에서까지 이성적 사고를 가르친다. 이렇듯, 전 생애를 이성적 능력을 함양하는데 다 소모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성을 이렇게 신뢰하게 된 것은 역사적인 이유가 있다. 먼저 이성의 지배를 받는 인간은 아테네에서 시작되었다.

 

호메로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스스로 행동하지 않고 신들에게 행동을 조종당한다. 자기 뜻대로 움직이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도 나타나는 경향이다.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조종하는 인간, 이성을 사용하는 인간이 등장한 것이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이성과 감정으로 나누지만 감정은 원시적이고 우둔하며 야만적이고 신뢰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 후 로마의 스토아학파 철학자 세네카는 열정을 악성 종기라고 불렀으며 “이성이 모든 생활 방식을 결정하는 사람이야 말로 행복한 사람이다”라고 했다. 그후 이성에 대한 화룡점정을 남긴 것은 임마누엘 칸트였다. 그는 현재까지도 이성이 완벽하게 통제하는 삶을 꿈꾼 철학자로 통한다. 물론, 그동안 인간이 이성을 필요로 했던 이유가 있다.

 

그것은 인간이 언어를 발명한 이유였다. 즉, 내면의 욕구를 정교하게 표현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상징적이고 추상적인 언어를 통해 복잡한 세상의 규칙을 만들고 노동 분업을 통해 역할을 나누기 위해 필요했던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개념과 그대로 잘 맞아 떨어진다. 언어를 통해 부모로부터 배운 규칙의 대부분은 사회와 융합할 수 있는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었으며, 자신의 욕구를 억누르는 것이 언어의 목적이었다. 이성의 장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성의 정보 처리는 느리지만, 정확도가 높다. 하지만, 인간의 뇌는 초당 1,100만 비트가 넘는 정보를 처리한다. 반면, 이성적으로 독서할 때는 초당 40비트, 계산할 때는 초당 12비트이다. 즉, 우리가 모르는 인간의 능력은 따로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의 자아는 복합체로 이루어져 있다. 즉, 인간은 이성, 오성, 감정, 직관, 무의식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이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과학이 비이성적인 측면을 무시했다는 것은 인간을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 달라졌고, 비이성적인 측면이 드러나고 있다. 드디어 이성에 대한 반격이 시작된다. 1980년대만 해도 학자들이 생각하는 자아는 이성과 관련된 것에 한정되었다. ‘인지 혁명’이 일어나던 그 당시 대부분의 학자들은 우리의 두뇌를 컴퓨터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인간을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에 비유하였다. 컴퓨터만 이해하면 우리 인간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컴퓨터에 두뇌를 비유하면서 우리는 이성적 자아상을 더욱 키웠다. 따지고 보면 컴퓨터의 특징은 그것의 심오한 감정이나 감각, 직관이나 존재하지 않는 그 밖의 비이성적인 힘들이 아니라 정확히 그 반대의 것으로 행하는 고도로 정교하고 논리적인 작업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상황이 달라졌다. 자아 속으로 밀고 들어갈 확실 한 도구들이 하나둘 선을 보인 것이다.

 

1980년대와 90년대를 지나면서 우리의 ‘하드디스크’를 직접 볼 수 있는 장치들이 개발되었다. MRI 같은 두뇌 스캐너를 이용해서 인간의 두뇌가 작업하는 광경을 밀리미터 단위로 정밀하게 볼 수 있게 됐다. 그 결과 학자들이 오랫동안 주장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사실이 밝혀졌다. 놀랍게도 모든 생각, 모든 인식, 모든 기억은 실질적으로 감정을 동반하는 것이었다.

 

두뇌 차원에서 사고와 인식과 기억 — ‘인지’라고 부르는 것 — 은 감정과 전혀 분리될 수가 없다. 이제 인간을 컴퓨터에 비유하기는 쉽지 않다. 인지 혁명이 ‘정서 혁명’에게 자리를 내주었기 때문이다. 이제 모두들 입을 모 아 말했다. 생각하려면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1990년대부터 심리학자들은 이성의 오류를 찾아내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이성은 생각보다 멍청하다는 것이다.

 

더 많은 고민과 분석을 통해 선택한 것은 더 나은 선택이 아니었으며, 고민을 적게 하고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 선택이 더 좋았다는 것은 수많은 심리학자들의 실험으로 확인되고 있었다. 1990년대 초 미국 심리학자 팀 윌슨은 자신이 가르치는 대학생들을 상대로 이런 실험을 실시했다. 그는 학생들에게 다섯 개의 포스터를 보여주고 이들을 두 집단으로 나누었다. 한쪽의 학생들에게는 선택 을 하기 전에 각 포스터의 장점과 단점이 무엇인지 짧게 적으라고 했고 다른 쪽 학생들에게는 포스터를 즉흥적으로 고르라고 했 다. 그 학기가 끝날 무렵 심리학자는 학생들에게 각자가 고른 포스터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물었다. 그랬더니 심사숙고 끝에 고른 쪽은 자신의 선택에 그다지 만족하지 못한 반면, 즉흥적으로 고른 쪽은 보다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을 뿐 아니라 그것을 자기 집 벽에 붙여두었다고 대답한 비율도 상대적으로 높았다. 정말 이상하다.

 

이것은 소크라테스가 바라던 상황이 아닐 것이다. 많은 학자들 역시 말도 안 되는 결과라고 하면서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실험을 다시 반복했다. 그러나 선택의 대상을 잼으로 바꾸건 대학의 강의로 바꾸건 피부 크림으로 바꾸건 결론은 달라지지 않았다. 더 많은 분석이 반드시 더 나은 선택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던 것이다. 아니, 오히려 많은 경우에서 고민을 적게 하고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수록 더 나은 결과가 나왔다.

 

이성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멍청한 것일까? 한마디로 대답하면, 그렇다. 멍청하다.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다. 학문적으로 정확히 표현하면, 의식적 이성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한계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직관 역시 완벽하지는 않다. 그러므로 이 둘의 장점과 단점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설문지의 경우도 그렇다. 심리학자들은 설문지로 인간을 판단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인간은 자신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마음을 여는 것에 솔직하지 않다. 인간은 속임수를 쓰며, 잘난 척 하고, 자신이 행동하는 이유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그문트 프로이트 이후 심리학자들은 무의식에 접근하는 방법을 두고 골머리를 앓았다. 그러다 미국 하버드대학교의 학자들이 수십 년 동안 실험을 통해 이 사진 테스트를 개발하였다. 이것이야말로 최대한 과학적인 방법으로 무의식의 욕망에 다가가는 테스트이다.

 

이런 욕망을 얼마나 마음껏 발산하느냐는 각자가 알아서 할 노릇이지만 욕망 그 자체는 세 가지 기본 범주로 요약할 수 있다. 즉 ‘성공’, ‘애정’, ‘권력’이다. 당신의 무의식이 성공, 애정, 권력의 유형 중 어느 쪽을 향하는지를 알기 위해선 조금 전 당신이 적은 이야기를 분석해보아야 한다. 성공지향적인 사람들은 어떤 일을 그 일 자체를 위해 완수해내고자 한다. 따라서 스스로 목표를 세울 수 있는 그런 직업을 선호한다. 명령이나 지시는 딱 질색이라고 느낀다. 모든 것을 자기 힘으 로 알아내고 싶어 한다.

 

애정을 지향하는 인간은 타인과 친밀한 관계가 될 때 행복을 느낀다. 좋아하는 사람과는 특히 자주 눈을 맞추고 상대에게 외면당했을 때 큰 상처를 받는다.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서로를 잘 모르는 대규모 집단에는 별 매력을 못 느낀다. 둘이 있을 때, 혹은 개인적인 교류를 나눌 수 있는 소집단에서 훨씬 신이 나고 행복하다.

 

마지막 세 번째 범주는 권력이다. 권력이란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똑같이 최고가 되려고 해도 자신이 세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주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 최고가 되려는 사람이 있 다. 전자는 성공지향적 인간, 후자는 권력 지향적 인간이다. 1980년대에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폴게티 박물관에서는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 미술 거래상이 박물관 측에 그리스 조각상 하나를 보여주었는데, 그 조각은 키가 족히 2미터는 되는 벌거벗은 청년이 왼쪽 발을 살짝 앞으로 내민 쿠로스상이었다. 이 조각상에 대해 거래상은 1,000만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가격을 요구했다. 당연히 박물관 측은 작품의 진품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섰다.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전자현미경, 질량 분석기, 방사선 회절 조사, 방사선 형광 조사 등 첨단 장비들을 이용해 대리석상 구석구석을 살폈다. 결과는 확실했다. 작품은 진품이었다.

 

진품 여부를 조사한 끝에 쿠로스상을 박물관으로 들여오기로 정했다. 그런데 계약서에 사인을 하기 직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전임 관장이 조각상을 볼 기회가 있었다. 그 순간 그가 처음으로 떠올린 단어는 ‘새것’이었다. 그들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추가 조사 결과 조각상은 로마의 위조 공장에서 만든 위조품이었다. 결국 1년여에 걸친 과학자들의 분석이 아무 소용없었던 셈이 다. 반면 몇 명의 미술 전문가들은 아주 짧은 순간에 정확한 판단을 내렸다. 그들이 이용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감각과 직관, 직감이었다. 결국, 인간에게는 감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생각, 인식, 기억은 실질적으로 감정을 동반해야 한다. 감정은 사고의 오류가 아니라 사고의 필수 요소이다. 기계들이 창의적 사고를 할 수 없는 이유는 감정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감정과 이성은 적대적인 관계가 아니다. 감정은 위기 상황에서 이성을 돕는다. 불안과 공포가 없으면 인간은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없고, 감정은 삶의 목표를 제시하는 것이다. 즉, 감정은 상황에 따라 뇌를 조절하게 되는데, 감정은 공포 모드, 사랑 모 드, 갈증 모드 등으로 뇌를 조절한다. 즉, 두뇌의 어떤 부위를 사용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예컨대, 공포 모드에서는 쾌락 을 추구하는 뇌기능이 활성화되지 않는다는 식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지 못하지만, 무의식은 초당 수백만 건의 개별 정보를 처리한다. 우리의 뇌는 일상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정보를 처리하고 있다. 따라서 그것이 없으면 우리의 일상생활은 엉망이 되고, 무의식은 자신의 욕망과 소망과 동경을 실현하라고 조정한다. 창의력에 대해서도 무의식은 충격적인 사실이 있다.

 

알버트 아인슈타인 “중요한 것은 직관이다. 직관의 정신은 신성한 선물이며, 이성의 정신은 충직한 시종이다”라고 말했다. 원래 이성은 우리의 새로운 이념과 사상을 점검하기 위해 존재했다. 하지만, 창의적 사고는 감정에 의존하며, 이성이 만든 결과물이 아니다. 효율성이야말로 이성의 강점이자 약점이다. 의식적인 목표를 염두에 두고 세상으로 다가가면 우리의 탐색망에 맞지 않는 것들은 하나도 보지 못한다.

 

영국의 심리학자 리처드 와이즈먼이 행한 작은 실험이 그 사실을 잘 보여준다. 그는 실험 참가자들에게 신문을 주면서 신문에 사진이 몇 장이나 실려 있는지 세어보라고 했다. 대부분은 2분 정도가 걸렸지만 혹시 실수했을까 봐 신문을 한 번 더 살피느라 시간이 더 걸린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그 누구도 심리학자가 신문 2면에 대문자로 크게 집어넣어둔 이 제목은 보지 못했다. ‘사진을 그만 세세요. 이 신문에 실린 사진은 43장입니다.’ 그런데도 모두들 사진의 개수를 세느라 여념이 없어서 그 문장을 보지 못했다. 그들의 이성은 오직 사진만을 보았던 것이다.

 

이성의 계산은 앞서 소음 실험에서 보았듯 사소해 보이던 것이 갑자기 중요한 것으로 밝혀질 때 허사로 돌아간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기 때문에 우리는 보통 효율적인 방법을 택한다. 하루 종일 마음을 열고 관망을 하고 모든 자극을 일일이 점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창의력에게 기회가 잘 주어지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창의적이라는 말은 의식적 이성이 효율적인 방법을 포기한다는 뜻이며, 빠른 해결책을 택하려는 성향을 억누른다는 뜻이다. 당장 문제를 풀려고 드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의 개방적 자세로 그 문제 안으로 ‘침투’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위험하다. 에너지와 시간만 낭비하고 결국 아무 결실도 얻지 못할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기 때 문이다. 사실 새로운 것, 창의적인 것은 목표나 최종 결과에만 관심을 보일 때가 아니라 ‘실수’를 저지르고 목표로 가는 과정을 사랑 할 때 가장 큰 기회를 얻는다.

 

그림이나 음악 작품, 책이나 과학 연구의 결과에만, 다시 말해 ‘결과물’이나 ‘해결책’에만 관심을 둘 것이 아니라 작곡하고 쓰고 연구하는 ‘과정’ 그 자체에도 관심을 두어야 한다. 아니, 전자보다 후자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 다. 지금은 인공지능 전문가들도 감정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인공지능 전문가들은 감정이 사고의 오류라고 주장했고 인지 과정에는 감정이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어느 정도 내용 없는 사고는 감정 없이 가능하지만, 창의적 사고는 감정에 의존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 증거로 남들보다 창의적이었던 사람들의 감정 세계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들의 감정은 변화무쌍하고 더 격렬하며 더 강렬하다. 게디가 비이성적이라고 무시하는 세계와 자주 접촉한다. MIT의 천재 수학자 노버트 위너(Nobert Wiener, 1894~1964)를 보자. 그는 사이버네틱스 이론으로 1950년대 인공지능의 선구자 였고, ‘피드백(feedback)’이라는 개념을 만든 수학자였다. 하지만 그는 조중과 울증의 단계가 번갈아 찾아오는 양극성 우울증을 앓았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20세기 창의적인 인물 1,000명을 분석한 결과가 있는데,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다.

 

작가와 시인은 우울증, 알코올 중독, 자살 부문에서 상위권을 차지했고, 위대한 작가들도 감정 기복과 알코올 중독, 자살 충동이 일상적이었다고 한다. 특히 천재들은 알코올 중독과 자살 비율이 매우 높다. 이것은 양극성 변화가 창의성의 촉진제이기 때문이다. 조증의 시기에는 아이디어가 활발해지고 울증의 시기에는 생산적인 상태가 활발해진다. 즉, 조증과 울증이 순간 반복이 되면 창의적 사고가 이루어진다.

 

한줄평

"창의성, 너무 어렵게만 생각하지 말자 누구에게나 감정기복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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